
새벽이 드리웠습니다. 며칠 간 펼쳐진 일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몇가지 모양을 살펴보며 맞춰 두자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것저것 끄적이다가 이내 그만두고 서재 앞에 섰습니다. 책등을 천천히 살피다 순간 마음이 멈칫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를 펼쳐 보았습니다.
시작법(詩作法) _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든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
어제는 아버지의 퇴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요 며칠간, 아니 몇달 전부터 아버지의 퇴임식은 마음 한 켠에 크게 자리잡은 무언가였습니다. 마무리가 커다랗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어떤 형태일지 몰랐습니다. 무얼 준비해야할 지,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 지 온갖 생각들이 난무하며 속이 마치 엉킨 뭉텅이 같았습니다.
엊그제는 아버지의 퇴임식 문구를 전달 받았습니다. 여러 업무 자료 속에서 건네 주신 5장 분량의 한글 파일, 글자 크기는 16 포인트. 제 눈에 편하게 글자 크기를 10 포인트로 작게 해보니 2장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문구를 말씀하시는 시간을 10분 남짓으로 생각하신다니 적당한 양인 듯 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다듬어 달라는 요청을 남기셨습니다.
큰 흐름 먼저 구분을 해보고, 표현을 자연스럽게 고치고 순서도 바꿔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흘러 들어오는 아버지의 글 내용은 지난 세월을 울컥 느끼게 했습니다. 어렴풋이 알던 내용이 상세하게 펼쳐지니 제게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까지 살펴보며 나름대로 정돈해보았습니다. 구분을 다시 지우고, 글자 크기를 키운 뒤에 글을 전해드렸습니다.
33년의 근속,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리잡으신 일터에서 떠나갈 준비를 마치는 시간. 괜스레 그 속에 제가 포함되고 있는 상황이 벅차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감사 인사에 몇 마디 더 얹을 이야기를 떠올려 두며, 퇴임식 전까지 반 나절 틈을 내어 예행을 해보았습니다. 식에 참석하신 분들은 대부분 공직자셨고, 일종의 공직 행사처럼 진행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곧 제 시간도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이 퇴임에 대한 또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책임을 다해봅니다. 마이크가 울린 것이 아쉬웠지만 몇몇 유도하고 싶었던 반응도 나와 다행입니다. 아버지께서도 잘 마무리하신 것 같다며 흡족해 하십니다. 딱딱할 뻔 했던 분위기를 풀어주어 고맙다고 하십니다.
식이 끝나고 쭈뼛거리는 제게 몇몇 분들께서 찾아와 좋은 이야기를 전해주니 마음이 한결 풀어졌습니다. 새롭게 펼쳐진 아버지의 시작(始作)이 앞선 시작처럼 흘러가기를 바라봅니다.
2023.06.22
새벽이 드리웠습니다. 며칠 간 펼쳐진 일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몇가지 모양을 살펴보며 맞춰 두자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것저것 끄적이다가 이내 그만두고 서재 앞에 섰습니다. 책등을 천천히 살피다 순간 마음이 멈칫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를 펼쳐 보았습니다.
시작법(詩作法) _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든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
어제는 아버지의 퇴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요 며칠간, 아니 몇달 전부터 아버지의 퇴임식은 마음 한 켠에 크게 자리잡은 무언가였습니다. 마무리가 커다랗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어떤 형태일지 몰랐습니다. 무얼 준비해야할 지,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 지 온갖 생각들이 난무하며 속이 마치 엉킨 뭉텅이 같았습니다.
엊그제는 아버지의 퇴임식 문구를 전달 받았습니다. 여러 업무 자료 속에서 건네 주신 5장 분량의 한글 파일, 글자 크기는 16 포인트. 제 눈에 편하게 글자 크기를 10 포인트로 작게 해보니 2장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문구를 말씀하시는 시간을 10분 남짓으로 생각하신다니 적당한 양인 듯 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다듬어 달라는 요청을 남기셨습니다.
큰 흐름 먼저 구분을 해보고, 표현을 자연스럽게 고치고 순서도 바꿔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흘러 들어오는 아버지의 글 내용은 지난 세월을 울컥 느끼게 했습니다. 어렴풋이 알던 내용이 상세하게 펼쳐지니 제게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까지 살펴보며 나름대로 정돈해보았습니다. 구분을 다시 지우고, 글자 크기를 키운 뒤에 글을 전해드렸습니다.
33년의 근속,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리잡으신 일터에서 떠나갈 준비를 마치는 시간. 괜스레 그 속에 제가 포함되고 있는 상황이 벅차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감사 인사에 몇 마디 더 얹을 이야기를 떠올려 두며, 퇴임식 전까지 반 나절 틈을 내어 예행을 해보았습니다. 식에 참석하신 분들은 대부분 공직자셨고, 일종의 공직 행사처럼 진행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곧 제 시간도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이 퇴임에 대한 또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책임을 다해봅니다. 마이크가 울린 것이 아쉬웠지만 몇몇 유도하고 싶었던 반응도 나와 다행입니다. 아버지께서도 잘 마무리하신 것 같다며 흡족해 하십니다. 딱딱할 뻔 했던 분위기를 풀어주어 고맙다고 하십니다.
식이 끝나고 쭈뼛거리는 제게 몇몇 분들께서 찾아와 좋은 이야기를 전해주니 마음이 한결 풀어졌습니다. 새롭게 펼쳐진 아버지의 시작(始作)이 앞선 시작처럼 흘러가기를 바라봅니다.
2023.06.22